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하르트 바그너 (문단 편집) == 바그너 그 이후 == [[http://www.bbc.com/culture/story/20140805-how-wagner-made-a-comeback|바그너는 어떻게 컴백했는가 / 2014년 BBC 기사]][* “그가 나치즘과 연관되기 전까지, 바그너의 음악은 다른 분야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이제 그는 다시 뮤즈가 되었다.”라는 주제의 기사.] 1883년 사망 당시 바그너는 유럽 전체에서 유명했고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작곡가였다. 바그너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간에 누구나 바그너에 대해서 뭔가 한마디씩 할 말이 있었고, 또 그에 대한 반론도 펼쳤다. 바그너는 유럽의 거의 모든 교양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바그너는 독일적인 것의 결정체요 민족 문화의 구심이었다. 이들보다 더 극단적인 이들은 바그너를 자기네 편이라고 믿었고 바그너야말로 [[유대인]], [[미국]]식 [[물질주의]], [[프랑스]]의 퇴폐주의, [[가톨릭]]의 독재에 대항하는 [[게르만족]]의 방파제라고 주장했다. 다만, 바그너가 [[극우]]파들만의 소유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틀렸다. 바그너의 음악은 [[좌익]]에서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들은 바그너가 한때 혁명에 가담했고 그의 음악에는 혁명정신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진보적인 프랑스의 바그너 애호가들의 다수가 이런 관점에서 바그너를 보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미국]]에서도 바그너의 인기가 독일 이민사회에서 시작되어 급속도로 넓고 깊게 확산된다. 미국인들은 당시 유럽인들에 비해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바그너의 음악이 주는 새로움 때문에 사회 여러 계층에서 수많은 팬을 만든다. 특히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열렬한 [[바그네리안]]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기가 상승했는데 교육을 받은 중산층 [[좌파]]들에게 어필했다.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들이 바그너에게 적대적이었다면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그의 음악을 찬양했다. 많은 작곡가들의 바그너의 음악을 ‘미래의 음악’이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사운드’를 이어가려고 조바심냈다. 이런 숭배 분위기 속에서 바그너의 추종자들은 리처드 바그너가 제시한 철학적인 이상, 다른 미적인 생각들, 그리고 그의 음악을 애착하고 바그너의 음악을 따르는것이 마치 성스러운 전투에라도 나가는 것인 마냥 생각했다. 이런 현상을 바그너주의(Wagnerimus)라고 한다. 19세기 말 바그너 사후부터 이 현상은 절정에 이른다.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바그너 음악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옛 시대의 무거운 스타일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의상이나 실내장식도 가볍게 바뀌었다. 이전 시대부터 바그너에 반대한 사람 중에 하나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며 ‘빛과 공기’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활기 넘치는 [[카르멘]]이야말로 미래의 음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그너의 인기는 여전히 대단했다. 무겁고 길고 강렬한 바그너의 작품들을 보통 사람들도 참을성 있게 즐기며 자신들은 [[바그네리안]](Wagnerian)이라고 했다. 작곡가들은 바그너를 연구했고 교훈을 얻어 표현했다. 대표적인 예로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같은 작곡가들이 등장했고 [[스트라빈스키]]는 평생동안 ‘바그너와 다른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세대도 나타난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 [[알반 베르크]]는 [[무조음악]]과 [[12음계]]를 만들었다. 음악학자들은 이것이 모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파르지팔]]’에 그 기원이 있다고 설명한다. 1906년에는 코지마가 아들 지그프리트에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운영을 맡기고 은퇴한다. 지그프리트는 1930년 어머니 코지마가 사망한 몇 달 후에 사망했는데 그때까지 성공적으로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1914년부터 1924년까지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페스티벌을 열지 못한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바이마르 시대의 불안한 상황에서 바이로이트는 다시 열릴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다. 그때 지그프리트의 아내 비니프레트는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고 친해진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워지고 히틀러는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받았다. 히틀러가 가장 좋아한 작곡가가 바그너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청년 시절부터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숭모하는 열광적인 추종자였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독일 국가를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는 영웅적인 신화와 결합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비니프레트는 남편이 죽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운영을 맡았다. 비니프레트는 히틀러의 지원을 원했고 히틀러는 1933년 수상이 된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비니프레트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히틀러의 [[나치당]]의 관계는 복잡했다. 비니프레트와 히틀러의 개인적인 친분 덕분에 바이로이트는 당시 다른 극장을 직접 통제하던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이로이트에는 나치 깃발이 걸리지 않았고 공연 전에 나치당가를 부르지도 않았다. 유대인이나 나치가 정한 불온 인물들도 얼마동안은 연주를 하도록 내버려뒀다. 그러나 바이로이트가 [[제3제국]]에 영합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망명길에 오르면서 바이로이트를 ‘히틀러의 궁정 극장’이라고 부르면서 비판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세계관에 자신이 숭배하던 바그너를 이용했고 또 문화 전쟁에서도 이용한다. 히틀러는 “누구든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을 이해하려면 먼저 바그너를 이해해야 한다!”, “독일은 바그너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같은 말을 하며 바그너를 찬양했다. 이런 이유로 바그너는 독일 국외에서 나치즘과 관련된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물론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그냥 나치 쪽에서 일방적으로 팬질한 것에 불과하다. 즉 히틀러는 바그너가 죽고 나서야 태어났다.] 그러나 전후 나치 독일을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토마스 만]], [[조지 버나드 쇼]][* 버나드 쇼는 바그너를 사회주의 영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쿠르트 바일]], [[테오도어 아도르노]] 같은 지식인들이 바그너에 대한 찬반토론을 미국에 전했으며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퍼러]], [[라우리츠 멜키오르]], [[롯테 레만]]같은 음악가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부흥시키며 새롭게 세상에 전한다. 현재에도 바그너는 지식인들과 사상가들에게 좋은 떡밥이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대표적인 책으로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쓰고 [[슬라보예 지젝]][* 슬라보예 지젝은 바그너의 팬이기도 하다.]이 의견을 더한 [[http://mobile.kyobobook.co.kr/showcase/book/KOR/9788996442059|바그너는 위험한가]]이다. 전쟁 후 비니프레트는 [[연합군]]의 조사를 받는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게 당연했지만 [[유대인]] 예술가와 [[동성애자]] 예술가들이 처형되지 않도록 도와준 증거가 나오며 연합군은 비니프레트를 그냥 풀어주며 은퇴하여 조용히 살 것을 권한다. 그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운영권은 두 아들 빌란트 바그너와 볼프강 바그너에게 넘어갔고 1951년부터 새로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시작된다. 전후 바이로이트에서 빌란트 바그너가 한 일은 팬들과 극장 예술가들에게 전설이 된다. 빌란트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복권시키려고 제3제국이 바그너에게 씌운 사상과 냄새를 없애기위해 작품들을 완전히 분해하고 하나씩 검토하여 재구성한다. 미니멀리즘의 무대가 나타났고 조명과 분위기를 통하여 민족주의 색채를 걸러냈고 범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드라마를 만든다. 1966년에 빌란트가 폐암으로 사망하자 동생인 볼프강 바그너가 운영을 맡았다. 볼프강은 외부 연출가를 불러 바이로이트를 새롭게 만들고 전후 ‘바그너 페스티벌’을 부활시켜 신바이로이트 시대를 개척한 인물이란 평을 받는다. 2008년 볼프강이 은퇴하고 후계자로 바그너의 직계 증손녀 카타리나 바그너를 지목한다. 이것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가문 중 포스트 볼프강 세대로서 바이로이트 총감독직 계승권을 가진 후손은 모두 12명이었다. 그중에서도 볼프강이 쉰이 넘어 낳은 카타리나는 서열상 제일 끝에 서 있었다. 그런 카타리나가 분쟁의 씨앗이 된 이유는 바이로이트의 공식 계승자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사망한 형 빌란트의 자식들은 물론 전처 엘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딸마저도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시킨 볼프강은 2002년, 두 번째 아내 구트룬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에게 바이로이트를 물려주겠노라고 공식 천명했다. 후계자로 거론되던 다른 후손들의 반발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예술감독까지 역임했던 볼프강의 장녀 에바와 뮌헨에서 드라마트루기로 활동중인 빌란트의 딸 니케의 반격은 꽤 위력적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다진 언니와 사촌에 비해 어린 카타리나의 배경은 반면 상대적으로 왜소했다. 1978년 태어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극학을 전공한 카타리나는 아버지 볼프강과 하리 쿠퍼 옆에서 조연출로 활동하며 도제교육을 받았다. 2002년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에는 이제 막 자신의 이름을 내건 데뷔작을 선보이기 직전의, 스물네 살짜리 소녀에 불과했다. 12명의 차세대 바그너 중에서도 가장 곱게 자란,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은 멀리서 보고 듣기에 그저 ‘부모 잘 만난 덕에 만사가 잘 풀린 케이스’로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바이로이트 축제 재단이사회는 2008년 바그너의 손자인 볼프강 바그너 전 총감독의 배다른 두 딸인 카타리나와 에바 바그너파스크비어를 공동 총감독으로 지명했다. 이로써 총감독 자리를 둘러싸고 7년을 끌어 온 바그너 가문의 내분이 일단락됐다. 형식은 공동이지만 사실상 볼프강 전 총감독이 원했던 젊은 카타리나가 자리를 계승하는 것으로 독일 언론은 보고 있다. 카타리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자신이 연출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시내 공공장소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생중계함으로써 입장권을 얻기 위해 보통 8~10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바이로이트 축제의 배타성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공동 총감독이었던 에바가 물러나고 카타리나 단독으로 총감독이 된다. 바그너는 여전히 그의 논란들 덕분에 계속해서 토론이 끊이지 않고 있는 클래식 음악가이며 그에 대한 찬반 토론은 계속해서 펼쳐질 것이다. 그의 음악은 여전히 많은 인기와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 축제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더불어 유럽 양대 음악 페스티벌로 꼽히고 있다. 반유대주의나 여성 편력 등 부정적인 면모도 있다. 영국의 지휘자 [[토머스 비첨]]은 바그너 악극 공연을 비난한 신문사 사장에게 "그럼 당신 신문사에 걸려있는 홀바인(독일의 화가)의 그림을 태워버리시오. 그럼 나도 바그너 악극을 연주 안하리다."라고 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과연 음악은 음악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봐야 하는지는 지금도 논란중인 문제이다. 어찌됐든 그의 음악이 전 세계 문화에 엄청난 영향력과 파급력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